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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여행/해외여행및 산행

베트남 하노이

     2017년 02월 07일 화요일

      *맑음

      *므엉탄쾅닌호텔~아베쎄휴게소~중식(쌀국수)~라텍스매장

        ~하노이시내관광(바딘광장,호치민생가,한기둥사원)~스트릿카관광~베트남 하노이공항

         ~캄보디아 씨엠립공항~아리랑(석식)~앙코르에라호텔 (ANGKOR ERA HOTEL)

      *여행일원들과 함께

바딘광장 호치민 묘

하롱베이에서 4시간여를 달려와 하노이 시내관광을 시작한다,

잠시 호치민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국민을 사랑하고 청빈하게 살다가 진정한 지도자를 보았다,

서서로를 나라와 결혼하였다하여 평생을 홀로 사신분, 재임기간중 친인척은 하노이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여

비리를 척결한분, 베트남 통일을 꼭 이루고 싶어한분, 끝내 조국의 통일을 보지는 못했지만,

사후에도 베트남인들의 가슴에 살아있는 진정한 영웅을~~~

  ▲하노이로 길 떠나기전 호텔에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이틀간 묶은 므엉탄쾅닌호텔 2304호 떠난다,

  ▲호텔앞에서 바라보는 하롱베이 일출




  ▲호텔옆 하롱테마파크 230인용 케이블카 탑승장










  ▲하롱베이를 떠나 하노이로 이동중 처음으로 노니 분말가루 판매장에 들린다,

  ▲노니나무 모종

  ▲유자나무

  ▲노니 술


  ▲노니는 다섯개중 한개정도만 노랗게 익어 최상급의 노니가 된다고 함

  ▲노니 판매장을 떠난다,

  ▲두번째로 아베쎄휴게소에 들려 쇼핑을 시작한다,



  ▲아베쎄휴게소 조각작품 판매장
















  ▲아베쎄휴게소 진출입구


  ▲아베쎄휴게소에서 구입한 노니비누

  ▲하노이에 도착 점심식사를~

  ▲쌀국수 맛 집이라고~








  ▲점심식사후 찾은 라텍스 매장



  ▲라텍스 매장을 다녀와 도착한 바딘광장




  호치민 묘

본명은 응웬 닷 탕(Nguyen Tat Thanh)이지만 어릴적 이름은 응웬 싱 콘이라고 불렀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개가 되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베트남의 중부지방이며 행정구역은

응헤안주에 있는 호앙쭈(Hoang Tru)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훼이서 북쪽으로 360km떨어진 오지였으며 주변환경은 혹독했다.

그의 아버지는 농민출신으로 평범한 지식인이였다. 그의 아버지가 훼에서 관직에 올랐지만

그해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가지 못해 면직되었다(1929년 사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응웬 닷 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1911년 발전된 서구의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호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갔다.

1914~1919년까지는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하인, 견습공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시야와 민족주의적 가치관은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919년 세계1차 대전이 끝나면서 파리에 정착하였다.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파리는 세계 식민지국가에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중심지였다. 1919년 6월 베르사유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여 일약 유명해졌다.

1920년 프랑스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고, 프랑스공산당 창립과 함께 그 당원이 되었다. 이듬해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식민지인민연맹을 결성하고, 기관지 《르 파리아》를 편집·발행하였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방부() 상임위원이 되었고, 코민테른에서

약 2년간 머물면서 공산당 혁명사상을 익혔다.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조국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이때 그는 리 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중국에 근거지를 두고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이곳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조직을 점점 강화해 나갔다.

1931년 6월 6일 홍콩의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석방되어 일단 모스크바로 돌아갔다가,

1940년부터 중국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1941년 2월 베트남에 잠입하였다.

당시 인도차이나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는 프랑스와 아시아로 지배영역을 넓혀가는 일본이 협약을 맺어 공동으로

식민지배를 하고 있었다.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월맹(또는 베트맹 :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를 목표로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웬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2차대전이 중반에 이르면서 일본의 패배가 직감되자 중국과 미국을 대상으로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의 지원을

받아내었다. 하지만 1942년 중국 중경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국민당에 체포되었다. 그는 이런 고난을 극복하고 1943년 9월에 석방되었고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미국은 낙하산 부대까지 투입하여 월맹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이런 상황을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민족해방혁명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호치민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되어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치민은 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퐁텐블로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을 직접 지휘하여 1954년 프랑스를 상대로 디엔비엔푸의

전쟁을 승리하여 독립을 지켰다.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베트남은 극도의 정치불안에 휩쌓이게 되었고

곧이어 남과 북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969년 9월 2일 9시 47분 주석(대통령)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하였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베트남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다.






  ▲국회의사당





  ▲하노이 주석궁 (프랑스 침략당시 프랑스 동양 전권부)





  ▲주석궁 관리동




  ▲호치민 집무실



  ▲호수와 관리동





  ▲호치민 묘 뒤편




  ▲베트남 국보 1호인 한기둥 사원





  ▲한기둥사원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한다고 함











  ▲바딘광장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호암끼엔호수에서 스트릿카를 타고 구시가지 중심가인 36거리를 구경한다,







  ▲스트릿카에서 시가지 구경










  ▲마스크를 끼고 스트릿카 관광





  ▲스트릿카 관광후 버스를 타고 하노이 공항으로




  ▲공항으로 이동중 바라본 풍경


  ▲하노이 공항 도착


  ▲소화물을 붙이고

  ▲나머지 과일을 처리한다,

  ▲하노이공항 주차장




  ▲17:55 VN 835편 항공기로 씨엠립


  ▲우리들을 모셔갈 항공기



  ▲씨엠립 공항 도착후 소화물을 찾는다,

캄보디아 지도

캄보디아 국기

위치 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남서부
인구15,957,223명 (2016)
수도 프놈펜
면적181,035.0㎢
공식명칭 캄보디아 왕국 (Kingdom of Cambodia)
기후열대몬순성기후
민족 구성 크메르족(90%), 베트남인(5%), 중국인
언어 크메르어
정부/의회형태 입헌군주제 / 양원제
종교 소승불교(95%)
화폐 리엘 (Riel)
국화 수련
대륙 아시아
국가번호855
GDP 19,368,000,000
인구밀도88명/㎢
전압220V / 50Hz

수도는 프놈펜이다.

서쪽과 북서쪽은 타이, 북동쪽은 라오스, 동쪽과 남동쪽은 베트남, 남서쪽은 타이 만(灣)과 접하고 있다.

넓은 평원과 여러 개의 큰 강으로 이루어진 캄보디아는 중국과 인도 및 동남 아시아를 잇는

주요 육상로 및 수로 가운데 위치한다.

프랑스와 미국의 영향 및 여러 아시아 문화의 영향이 수도인 프놈펜에 다양하게 나타난다.

프놈펜은 대부분이 농촌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중심지 모습을 띠고 있다.

2,000년 동안 캄보디아는 인도와 중국으로부터의 영향을 흡수했으며,

그 흡수한 문명을 다른 동남 아시아로 전파했다. 1~8세기에 푸난과 첸라의 힌두교-불교 왕조에서부터

9~15세기 앙코르 시대를 통해, 캄보디아는 지금은 타이, 베트남, 라오스의 일부가 된 영토를 지배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은 12세기에 왕조의 전성시대를 누렸다.

이 시기는 앙코르와트, 바욘, 그리고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톰으로 알려진 거대한 사원 건축물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400년에 걸친 쇠퇴기 후에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20세기 동안에는 전쟁의 혼란을 경험했다.

그 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했고, 그 이후 다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다.

1975~79년 나라는 농촌에서 공산주의 게릴라 운동을 펼치던 크메르루즈의 집권으로 황폐화되었다.

크메르루즈 집권기 동안 최소한 150만 명에 달하는 캄보디아인들이 피살되었거나 사망했다.

캄보디아는 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캄푸차 인민공화국 정권 아래서 회복을 위한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 나라는 정치적 자치를 회복했고 헌법에 기초한 정부를 재수립했다.

 이어서 보통선거를 시행했다. 캄보디아 경제는 꾸준히 개선되었고,

이 나라는 "미래를 겁내지 말고 과거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는 캄보디아의 격언대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캄보디아 씨엠립 현지 가이드 배중한 팀장 HP: 092-950-074

  ▲캄보디아 씨엠립 도착후 한국음식전문점 아리랑에서 낙지뽁음 석식을~




  ▲아리랑에서 석식을 먹고 앙코르에르 호텔 도착



  ▲앙코르에라호텔 334호 투숙 짐을 푼다, 







  ▲야경속에 호텔을 둘러본다,







  ▲앙코르에라호텔 334호 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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