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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둘레길/해파랑길(완료)

해파랑길 47코스 고성구간

     2017년 07월 09일 일요일

      *맑음 (폭염주의보 발령)

      *삼포해변~송지호해변~송지호~왕곡마을~공현진항~가진항   12.18km  4시간49분 소요

      *옆지기와 둘이서 걷기   

 해파랑길 47코스

푹푹 찌는듯한 더위에 그늘조차 없는 해변길을 옆지기와 둘이서 걷는다,

오손도손 추억 한자락을 공유하기 위해 웃음으로 걷는다,

해수욕을 즐기는 인파들을 보면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바닷물에 뛰어들고픈 충동을 꾹꾹 누르고 걷는다,

  ▲삼포해변 47코스 시작점에서

  ▲삼포해변 여름축제를 위해 무대가 설치되고 있다,



  ▲삼포해변


  ▲봉수대 오토캠핑장










  ▲오호교를 지나 송지호해변으로

  ▲송지호해변 서낭바위 산책로 따라 서낭바위로~


  ▲오호항


  ▲송지호해변 서낭바위




























  ▲송지호해변










  ▲시원한 다리밑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송지호


  ▲송지호





  ▲송지호 철새관망타워


  ▲송지호 철새관망타워에 올라갑니다, 입장료 1,000원

  ▲5층 전망대에 올라 쌍화차 한잔씩 합니다,





















  ▲왕곡마을에 들어섭니다,


왕곡마을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위치한 왕곡마을의 형성은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 두문동 72현 중의 한 분인 양근 함씨 함부열이 이성계의 조선건국에 반대하여

간성에 낙향 은거한데서 연유하며 그의 손자 함영근이 이곳 왕곡마을에 정착한 이후

함씨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생활해 왔다.

특히,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체 잘 보존되어 왔기에

전통민속마을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0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235호로 지정, 관리되어오고 있다.


이처럼 왕곡마을은 고려말, 조선초 이래 양근 함씨와 강릉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며

600년 세월을 정주해온 전통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부터 이 지역은 면소재지였으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884년에는 왕곡마을이 금성(錦城),

왕곡(旺谷), 적동(笛洞) 세 마을로 분리되었다. 금성에는 양근 함씨가, 왕곡에는 강릉 최씨가,

적동에는 용궁 김씨가 많이 살았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이 세 마을을 다시 합쳐 오봉(五峰)이라 불렀고

한국전쟁이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오봉1리(금성,왕곡)와 오봉2리(적동)로 합병, 분할되었다.

즉 현재의 왕곡마을은 금성과 왕곡 두 마을이 합쳐진 곳으로 오봉1리에 해당하며 적동마을은 왕곡마을로부터

 700~800m 서쪽에 위치한 오봉2리이다.










  ▲가던길을 멈추고 그네를 타고 널뛰기도 함께 해봅니다,






  ▲한고개집




  ▲동주 영화 촬영지 정미소를 지납니다,











  ▲함희석 효자비




  ▲함정균 가옥













  ▲성천집








  ▲돌 너와집





  ▲옆지기는 평마루에 앉아 휴식을 취한다,

  ▲왕곡마을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길을 재촉해 갑니다,










  ▲두백산에 올라보고픈 충동을 꾹꾹 누르고 길을 이어갑니다,



  ▲왕곡마을 저잣거리


  ▲왕곡마을을 찾아 점심을 먹을려고 했는데 식당이라곤 하나도 없어 배를 쫄쫄 굶겨서 공현진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땡볕에 아스팔트길에서 열기가 팍팍 올라온다,



  ▲공현진교를 건너서 공현진항으로



  ▲공현진항 등대





  ▲공현진항구 횟집으로 들어갑니다,


  ▲물회 참으로 시원하게 맛깔나게 먹는다, 더위도 덩달아 싸~악~~



  ▲공현진항


  ▲공현진 숫돌개바위




  ▲공현진해변











 



  ▲가진항에 도착하여 47코스를 마무리한다,


  ▲4대사찰중 하나인 고성군 건봉사를 찾는다,










건봉사

520년(신라 법흥왕 7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758년에 발진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스님등과 염불만일회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됩니다.

여기에 신도 1,820인이 참여하였는데, 그 중에서 120인은 의복을, 1700인은 음식을 마련하여

염불인들을 봉양하였습니다. 787년에 염불만일회에 참여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에 왕생하였고,

그 뒤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이 차례로 왕생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아미타 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 서쪽에 봉황새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서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358년에는 나옹스님이 중건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여 비로소 염불과 선, 교의 수행을 갖춘 사찰이 되었습니다.


1465년에는 세조가 이 절로 행차하여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뒤 어실각을 짓게 하고 전답을 내렸으며,

 친필로 동참문을 써서 하사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조선왕실의 원당이 되었는데,

성종은 효령대군, 한명회, 신숙주, 조흥수, 등을 파견하여 노비, 미역밭과 염전을 하사하고

사방 십리 안을 모두 절의 재산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을 기병한 곳으로

호국의 본거지이었으며, 1605년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에 강화사로 갔다가 통도사에서 왜군이 약탈하여 갔던

부처님 치아사리를 되찾아와서 이 절에 봉안한 뒤 1606년에 중건하였습니다.


1802년에는 용허 석민스님이 제2회 염불만일회를 열었으며, 1851년에는 벽오 유총스님이 제3회 염불만일회를 열었고, 1878년 4월 3일에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었는데 다음 해에 대웅전, 어실각, 사성전, 명부전, 범종각, 향로전, 보안원, 낙서암, 백화암, 청련암을 중건하였습니다.

1881년에는 만화 관준스님이 제4회 염불만일회를 설치하였고, 1906년에는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산실인

봉명학교도 설립하였습니다. 1908년 제4회 만일회를 회향한 뒤 금암 의훈스님이 제5회 염불만일회를 설하고

옛부터 있던 돌무더기의 소신대에 31인의 부도를 세우는 한편 1921년 인천포교당과 봉림학교를 세웠으며, 한암스님을 청하여 무차선회를 여는 등 우리나라 4대 사찰의 하나요 31본산의 하나로서 명망을 떨쳤던 곳입니다.

한국전쟁 때 완전히 폐허화 되었으나 중창불사를 통해 사격을 다져가고 있습니다.







































  ▲속초 노학동 초당순두부마을 김영애 할머니집을 찾아 초당 순두부 한그릇 한다,




  ▲저녁을 먹고 3박4일 일정의 숙소인 현대수콘도미니엄에 도착하여 7112호실을 배정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