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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사진/경상도의 산

남산

     2018년 02월 15일 목요일 (설 연휴)

      *맑음 (포근한 봄 날씨)

      *상서장~공동묘지~해목령~국사골상사바위~남산(금오봉)~상사바위~바둑바위~부흥사

            ~늠비봉(오층석탑)~금오정~부처골(불곡마애여래좌상)~상서장   12.23km   3시간54분소요

      *나홀로 산행

남산(금오봉) 468m

까치까치 설날은 오늘이구요, 우리우리 설날은 내일입니다,

설 연휴 첫 날 딱히 할 일도 없고 시간이 무료하여 경주 보물 순례길에 나선다,

 경주 남산일원 세계유네스코 문화유산 보물이 산 곳곳에 흩어져있다,

하나 둘 보물의 찾아 베일을 벗겨 보자~~~

상서장-공동묘지-해목령-남산일주도로-상사바위-금오봉-상사바위-바둑바위-부흥사-늠비봉오층석탑-금오정-불곡마애여래조상-인왕2재-상서장

범해 (泛海)

                                                              최치원 (崔致遠)

돛 달고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

뗏목 탄 한나라 사신이 생각나고

약 캐는 진나라 아이 생각나네

해와 달은 허공 밖에

하늘과 땅은 태극 안에 있네

봉래산이 가까이 보이니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러 하네

  ▲상서장 오름길

상서장

최치원(857(문성왕 19년)~???)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신라 말 ‘세 사람의 최씨’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문장을 인정받았다. 특히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의 기초를 작성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최치원의 집안은 귀족 출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6두품으로 신라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상서장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한다.

그는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진성여왕에게 바쳤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

최치원은 이후 해인사와 경주 남산 등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한 듯하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와가 3동으로 되어 있으며,

1874년(고종 11)에 건립된 비가 있다.





  ▲산행 들머리



  ▲공동묘지


  ▲국립공원 내 분묘 이장시 이장비 지원 안내판

  ▲누운자나 산자 모두 속 앓이 많이 하겠다, 장례문화가 옛날과 지금은 현저히 차이가 난다, 그렇더라도 현존하는 이들이 앞서간 이들에 대한 예우는 다해야지???





  ▲이들 민초도 나라를 위하는 맘은 여느사람과 똑 같았을진데~~ 현세대가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보기 흉하다고 이장하라니~~ ㅉㅉㅉ














  ▲남산 일주도로에 들어선다,


  ▲효염 100% 우리아들 기도처 (아빠만 바라보던 해바라기 아들이 어느새 장성하여 장가를 간다니 인생사 일장춘몽이라 했던가~~~)

  ▲상사바위의 청송



  ▲상사바위




  ▲남산 금오봉에 오르다,






  ▲상사바위


  ▲바둑바위

  ▲바둑바위에서 바라보는 경주 시가지

  ▲바둑바위에서 바라보는 망산



  ▲포석골의 겨울  



  ▲부흥사







  ▲부흥사 대웅전




  ▲늠비봉 오층석탑















  ▲금오정



  ▲또 다시 만나는 아들의 기도처




  ▲불곡마애석불좌상 가는길






불곡마애석불좌상 (보물 제198호)

높이 3m, 폭 4m 정도 되는 바위에 높이 1.7m, 폭 1.2m, 깊이 0.6m의 감실을 파 그 안에 새긴 것으로

불상의 높이는 1.4m 정도이다. 감실은 입구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석굴의 느낌을 주는데 단석산의 석굴사원,

군위 제2석굴암과 함께 석굴 양식의 변천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산죽이 무성한 대숲 사이 작은 바위 속에 새겨진 석불좌상은 조각양식으로 보아

고신라의 것으로 보이며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배를 그러안은 듯한 손갖춤을 짐작할 수 있는 대의(大衣)나 치마처럼 대의가 좌대를 덮는 상현좌(裳懸座)를 볼 때

백제의 예산사면석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에서 그 양식적 선구를 찾을 수 있다.

얼굴은 고부조로 도드라졌으나 몸은 저부조로 얕게 조각되어 있다.

육계는 낮고 머리는 소발이며 고개를 약간 숙여서 명상에 잠긴 듯하다. 얼굴은 부드러운 양감으로 조각되었는데

광대뼈가 나오고 눈두덩도 불거져 있다. 어깨를 각지게 표현하여 상체가 네모나다.

두 손도 소매에 넣어 가슴에 모아서 전체적으로 네모진 모습이 안정감 있게 보인다.

오른발을 왼발 위에 올렸는데 발이 유난히 커서 삼국시대의 큰 손발 표현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는 통견인데 두께가 느껴지고 옷깃이 매우 넓어 태안마애삼존불상에서 볼 수 있는

삼국시대 옷깃 조각의 전통을 볼 수 있다. 모든 옷 주름 선은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소매에서 내리는 선묘들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무릎 위의 선도 물결처럼 겹겹이다.

무릎 아래서 흘러나오는 주름이 2단을 이뤄 대좌를 덮어 상현좌를 이룬다.

이처럼 안정된 구도, 단아한 형태, 부드러운 양감을 보이면서도 내면에서 발산하는 불력을 은은히 표현하여

삼국시대의 고졸미를 대표하는 불상이라 할 수 있다.







  ▲부처골 산행 들날머리






  ▲고청 고택



  ▲상서장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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