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01월 01일 월요일
*맑음
*낙산사의상대일출~하조대~명주사~낙산해변
*옆지기와 둘이서
낙산사 해수관음상
나날이 밝은미소로 중생들의 돌보미 역활을 충실히 해주시는 해수관음상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홍조를 뛰고 자애로워 보이신다,
묵묵수행이라 했던가 말씀은 없지만 발아래 업드려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의 안녕을 비는 수 많은 중생들의
새해소망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그시 두 눈 감고 큰 귀로 경청하시고는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시는듯 하시다,
새해 첫 날 낙산사에서 일출을 맞이하며 이곳을 찾은 모든분들과 더불어 가족의 무사안녕을 빌어본다,
▲낙산사 의상대로 가는길에 낙산해변을 내려다본다, 주변일때는 교통지옥이다, 주차할곳이 없어 서로 엉켜 지옥 교통지옥, 소원실은 풍등만이 유유자적 하늘을 날고
▲새해 첫 날 떡국인지 국수인지는 알수가 없지만 줄지어 선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냥 패스
▲홍련암으로 가는길에 자리잡고 서서 일출을 기다린다,
▲수 많은 사람들이 단 한곳을 응시하고
▲수 많은 풍등이 낙산해변에서 이곳을 찾은 이들의 새해소망을 실어 동해바다로 배달을 계속하고 있다,
▲옆지기도 뚫어져라 동녘바다를 응시한다,
▲동해 낙산앞바다에 붉은 점하나 관측된다, 일출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여기저기서 힘차게 떠오르는 새해 첫 태양이 개머리를 닮았다고 이구동성으로 웅성 거린다,
▲마지막 소원실은 풍등인가 갈길이 바쁜듯
▲햇님이 바위 옆으로 모습을 감췄다,
▲가족의 안녕을 비는 옆지기
▲햇님 따라 옆으로 조금씩 이동했더니 또 다시 힘찬 기운을 내뿜으며 살짝 옆모습을 보여준다,
▲홍련암쪽으로 많이 이동하여 온전한 모습을 바라본다,
▲새해 첫 태양을 두손으로 받들어 가슴에 품고 무사안녕을 비는 옆지기
▲이 분 또한 간절하고 절실함을 담아 새해소망을 맘 속에 새기는 듯~~~
의상대
의상(義湘)의 좌선(坐禪) 수행처였으며 위치는 낙산사(洛山寺)에서 홍련암(紅蓮庵)의 관음굴(觀音窟)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멀리 동해를 바라보는 전광 좋은 곳에 위치한 이곳은 의상이 낙산사를 창건할 때
머무르면서 좌선하였던 곳으로, 원래는 암자가 있었다 하나 한때 폐허가 되었다.
1925년 이곳에 한 정자를 짓고 의상대라 하였다.
8각으로 만들어진 이 아담한 정자는 주위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낙산사를 설명할 때에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예로부터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다.
▲2018년 새해 낙산사 의상대에서
낙산사
양양군 북쪽 해안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는 오봉산(五峰山)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다. 의상이 하루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친견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 기도한 의상애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곳이 낙산사다.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
이곳은 오늘날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觀音聖地)로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참배하고 있다.
참고로 4대관 음성지(觀音聖地)는
①낙산사 홍련암
②강화도 석모도 보문사
③남해군(南海郡) 금산(金山) 보리암(普提庵)
③통천군 금란굴(金蘭窟)이다.
1977년에 오봉산 자락 신선봉 정상에 동양 최대 해수관음보살을 세웠다.
낙산(洛山) 주위의 경관을 다시 여덟곳으로 나누어 낙산팔경이 전해오고 있다.
낙산팔경은
① 낙산사의 저녁 종소리(洛迦暮鐘)
② 설악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雪岳返照)
③ 광석에서의 한밤중 다듬이 소리(廣石夜瞻)
④ 기동에서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基洞暮煙)
⑤ 망월대 앞 동해 모래사장에 내려오는 기러기떼(平沙落雁)
⑥ 멀리 망월대 앞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遠浦歸帆)
⑦ 길게 뻗어내린 남대천의 물줄기(九萬長川)
⑧ 망월대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정취(望亭秋月)이다.
▲해수 관음상도 붉게 타오르는 새해 첫 일출을 인자하게 내려다 보시며 무슨 소망을 담았을까???
▲길에서 길을 묻고
▲음식 배식소는 패스하고
▲매표소를 빠져나온다, 새해 첫날인데 악착같이 줄을 세워 입장료를 받더니 지금은 환산하네~~~
▲낙산해변 금빛 모래사장으로 힘차게 파도가 밀려든다,
▲사납게만 느껴지든 파도가 오늘따라 힘차게 느껴진다, 인식의 차이인가???
하조대
일대는 암석해안으로 온갖 기암괴석과 바위섬들로 이루어져 주위의 울창한 송림과 어울려 절경을 이룬다.
고려말 하륜과 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꾀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는 설과,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두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조선 정종 때 정자를 세웠으나 현재는 바위에 새긴 하조대라는 글자만 남아 있으며, 근래에 와서 육각정이 건립되었다. 하조대해수욕장은 수려한 경치를 배경으로 약 4㎞에 걸쳐 백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너비 150m, 넓이 0.083㎢, 연평균 수용인원 약 16만 명이다.
1976년 개장해 1984년 시범해수욕장이 되었다. 해수욕장 남쪽으로는 광정천(光丁川)이 동해로 흘러들고 있다.
▲하조대 해안절벽의 명품송
▲200여년을 사신 할배 소나무
▲하조대 정자에 올라 상념에 잠긴 옆지기
▲하조대 등대
▲등대에서 바라본 하조대 명품 소나무
▲물보라
▲하조대 막국수집을 찾아 막국수 한그릇 뚝 딱
▲명주사로 가는길
▲길 강에 늘어선 돌탑들
▲천년고찰 명주사 도착
▲이 놈도 힘찬 기운을 받았네 그려~~~
명주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1009년(목종 12)에 혜명(惠明)과 대주(大珠)가
창건한 뒤 그들의 이름 한자씩을 따서 명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123년(인종 1) 산내암자인
청련암(靑蓮庵)과 운문암(雲門庵)을 창건하였고, 1673년(숙종 2)수영(秀瑩)이 향로암(香爐庵)을 창건하였다.
1701년에는 법당 맞은편에 벽옥루(碧玉樓)를 지었고, 1781년(정조 5)에는 연파(蓮坡)가 원통암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조성 봉안하였다. 1849년(헌종 15), 1860년(철종 11)에 잇달은 화재로 소실되자 1861년월허(月虛)와 인허(印虛)가
중건하여 만일선회(萬日禪會)를 개설하고 향로암을 서쪽으로 옮겨 중건하여 보련암(寶蓮庵)이라 하였으며,
1879년(고종 16) 불탄 뒤 1880년에 일봉(日峯)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1897년 다시 불타자 부속암자였던 원통암(圓通庵)으로 옮긴 뒤 명주사라 하였다.
그리고 1899년 향로전을 짓고, 1906년 사역을 확장하여 중건하였다.
그뒤 1917년 당시의 주지 김백월(金白月)이 크게 중건하였으며, 1923년 주지 윤설호(尹雪昊)가 중수하였다.
그러나 6·25 때 폐허가 되어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3년수룡(壽龍)이 법당과 삼성각·추성각(秋聲閣)을
중건하였고, 1979년마근(麻根)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삼성각·요사채 뿐인
작은 절이지만, 예로부터 이름난 선원(禪院)으로 많은 학승들을 배출하였다.
20대의 어린 나이로 월정사(月精寺)의 주지를 역임하였던 이종욱(李宗郁)도 이 절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법당 안에 1705년(숙종 31)에 조성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63호 명주사 동종이 있으며,
절 앞의 많은 부도와 탑비들은 절의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또한 절에서 500m 아래에 있는 중봉당선사탑(中峯堂禪師塔)은 높이 2.5m 정도의 부도로
그 앞의 논이 옛 절터였음을 말하고 있다. 절의 뒷산인 만월산에는 문필봉(文筆峰)이 있어
이 절에서 공부하는 승려들이 그곳에 올라가 기도하면 도를 깨친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명주사 고려 범종
▲명주사 부도군
▲명주사로 가는길 명품 소나무길
▲명주사로 가는길 위에서
▲낙산해변으로 되돌아 왔다, 신나게 노래 한곡조 뽑고
▲낙산해변에서 새해 첫 날 슈퍼문을 담는다,
▲힘 찬 파도와 슈퍼문
▲라메블루에서 커피한잔으로 잔떡 움추린 몸을 녹이고 아담하우스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