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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간9정맥 기맥 지맥/낙남정맥(완료)

8구간 발산재~여항산~한치

     2012년 05월 20일 일요일

      *맑음

      *발산재(08:31)~오곡재(10:52)~미산령(11:38)~여항산(12:42)~서북산(14:02)~버드내(임도)

       ~대부산(15:11)~봉화산(15:33)~한치고개(진고개)(16:35)  24.9km  8시간 04분소요

      *뚜벅이회원 34명과 함께

여항산 770m

이틀전 거제 동서지맥을 다녀와서 인지 산행초입부터 몸이 무겁다는 느낌 이였으나 산행을 거듭 할수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5월의 날씨치고는 기온이 높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숲은 초록옷으로 갈아 입고 빼곡히 나무들이

채워간다, 여러번 된비알을 오르고 내려 여항산에 도착하여 바라보는 조망은 가슴 펑 뚫리게 시원하다,

서북산엔 전적비가 있고 지나온 여항리 낙남정맥길은 한국전쟁당시 목숨을 잃은 유골들의 발굴터가 웅덩이가 되어

곳곳에 늘려있어 가슴이 아프다, 대부산을 오르는 길에 만난 염소 가족들 어미가 갓 새끼들을 낳았나 보다

겨우 일어서 어미 젖을 찾고 있는 새끼들이 참으로 어여쁘다, 야생 염소들이여 무럭무럭 자라거라

봉화산을 덤으로 챙겨 함안 파산 봉수대를 보고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한번 배우고 한치로 내려서니 앞서간 일행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늘 산행이여 무사히 끝이라고 종결을 고한다, 

발산재-오곡재-여항산-서북산-대부산-봉화산-한치고개(진고개)

 

 발산재

 발산재 단체사진

 발산재 산행들머리

 발산재에서 오곡재방향을 따른다

 등산로 옆 친환경적인 의자

 영봉산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오른다

 숲이 우거진 등산로

 여항리 한국전쟁 당시 전사자 유해 발굴터 (2002년 태풍 루사때 발견됨)

 

 소나무 가지사이에 자라고 있는 옺나무

 낙남정맥 선답자들의 발자취

 

 함안군 군복면 오곡리

 낙남정맥길

 524.4m봉

 524.4m봉 삼각점

 

 오곡재 이정표

 오곡방향으로 10여m 내려서 우측 경사면으로 오른다,

 

 

 바위 전망대에서

 바위 전망대에서 여항산을 뒤로하고

 여항산으로 가는 능선

 지나온길 뒤돌아보기

 함안군 진전면 여양리

 미산령으로 내려서는길

 미산령 낙남정맥 안내판

 미산령 동물 이동통로

 미산령 정자

 미산령에서 여항산 오름길

 여항산 오름길

 여항산 오름길

 전망대에서 뒤돌아본 낙남정맥길

 여항산 지능선

 함안군 여항면 일대

 여항산 오름길

 

 

 봉성 저수지

 진전면 여양리

 여항산 미산봉 돌탑

 여항산으로 가는길

 

 

 여항산 헬기장

 여항산

 여항산 나무테크

 봉성 저수지

 여항산 나무테크

 여항산 정상석

 솔낭구님과 함께

 경주 즐거운인생 게스트와 솔낭구님

 금수강산님과 함께

 

 지나온 여항산 나무테크

 여항산 정상에서

 몽블랑님

 정연찬 선두대장님과 몽블랑님

 

 수성님

 여항산 암봉

 여항산에서 내려다본 여양리

 여항산에서 내려서는길 나무테크

 

 여항산 정상 뒤돌아보기

 뒤돌아본 여항산

 등산로 쉼터

 여항산 로프구간

 소무덤봉 위험 경고판

 

 

 

 선답자들의 발자취

 

 

 전망대에서 서북산을 바라보는 솔낭구님

 

 서북산으로 가는길

 

 서북산 전적비

이곳 서북산 전투는 6,25 한국전쟁 중 낙동강 방어전투가 치열하였던 50,8월에 미 제25사단 예하

제5연대 전투단이 북괴군을 격퇴하여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을 가능케 하였던 격전지이며 이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중대장 티몬스 대위 외 100여명의 넋을 기리기위해 그 아들 주한 미8군 사령관

리챠드 티몬스 중장과 제39사단장 하재평 소장을 비롯한 사단 장병 및 지역주민들이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웁니다,

                                                                           1995, 11

 서북산에서 솔낭구님, 몽블랑님, 정연찬부대장님, 금수강산님, 경주즐거운인생 게스트님

 

 

 서북산 정상석

 서북산 정상 안내판

 서북산 정상 헬기장

 

 진북면 영학리

 진북면 영학리

 버드내 임도로 내려서는길

 등산로 옆 쉼터

 버드내 갈림길

 대부산으로 오르는 임도

 대부산 오름길 바위

  대부산을 오르는 길에 만난 갓 새끼를 낳은 염소가족

  염소가족 (어미와 새끼 두마리)

 평자산 갈림길

 평자산 갈림길 시그널

 대부산 정상

  대부산 정상에서

 대부산 정상 삼각점

 대부산에서 솔낭구님

 

 봉화산 갈림길

 봉화산(파산) 봉수대

 봉화산 이정표

  봉화산 정상에서

 

 

 함안 파산 봉수대 안내문

 함안 파산 봉수대

 함안 파산 봉수대

                                                                경상남도 기념물 제220호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조선 전기에 설치된 이곳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중에는 동래에서 서울로 이르는

제2봉수대로 속하였다 이곳 파산(해발 675.5m) 꼭대기는 남쪽으로는 진동방면의 남해안과 북쪽으로는

함안군 일대 및 의령방면을 한눈에 조망 할수 있어 봉수대로는 최적지이다

현재 남북 39m 동서 15m정도 규모의 봉수대 터와 그곳의 건물 터가 확인되고있다

봉수대 터에는 높이 2.3m 둘레8m 정도의 돌로 쌓은 연대가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조선시대 봉수시설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남쪽으로 마산시 진동에 있는 가을포 봉수대와

북쪽으로는 의령의 가막산 봉수대와 서로 연결되어 소식을 전달 하였다고 한다,

 

 봉화산을 다녀오는 길  

 봉화산을 다녀오는 길

 봉화산을 다녀오는 길

 

 되돌아온 한치(진고개) 갈림길

 선답자들의 발자취

 하산길 옆 너럭바위

 봉곡 갈림길

 한치고개로 내려서며

 진고개(한치고개) 휴게소

  한치고개

  함안 아리랑 보리 한우 식당옆으로 다음구간 들머리

 

 진고개 휴게소  

 한치고개

 

 보리한우 식당 옆 노거수

 노거수 아래 평상에서 올려다본 나무가지

 노거수 둥치

 

충렬공 이방실장군 태역비 

                    본관은 함안(咸安). 함안이씨의 시조이다. 충목왕을 원나라에 호종한 공로로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었다. 1354년(공민왕 3)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는데,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1359년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 명의 홍건적을 이끌고 의주·정주·인주 등을 함락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 등과 함께 철주에서
                    이를 물리쳤고, 이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도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그 공으로 추성협보공신
                    (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그후 홍건적이 70척의 배를 이끌고 또다시
                    서해도에 침입하자 풍주(豊州)에서 물리쳤다. 1361년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주원수(周元帥) 등이 이끄는 20여 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침범하자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김경제(金景磾) 등과 함께 개주(价州)
                    연주(延州) 등에서 싸웠으나 절령(岊嶺)에서 참패하여 개경을 빼앗겼고, 공민왕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로 피난했다. 이듬해 정세운(鄭世雲)·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와 함께
                    20만 명의 대군으로 개경을 공략·수복하여 반성·사유·관선생 등을 비롯한 많은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무공으로 왕의 신임을 독차지한 것을

                 시기한 김용(金鏞)·박춘(朴椿)의 흉계로 안우·김득배와 함께 피살되었다.

충렬공 이방실장군 태역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