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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부산 갈맷길(완료)

갈맷길 7코스 7-3구간 (동래구청~동래향교)

     2019년 12월 01일 일요일

      * 비

      *동래구청~만세거리~동래부동헌~동래시장~송공단~법륜사~박차정생가~동래고등학교~충렬사

         ~내성초등학교~복천동고분군~인생문~북장대~북문~장영실과학동산~동래읍성역사관~복천동박물관

           ~복천동고분군~동래읍성북문~서장대~자비암~동래향교   10.23km   5시간31분소요

      *옆지기와 둘이서 걷기

동래읍성 북문

오늘은 전국적으로 비 소식이 있다,

오전에 잠시 소강상태를 보인다기에 길을 떠날까??? 말까??? 잠시 망설임의 시간을 갖고

갈까??? 말까??? 고민 될때는 가라하지 않던가~~~ 그래 가자!!!

갈맷길 따라 역사의 현장으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던 동래읍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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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구청 앞마당에서 유물발굴이~~~

  ▲가랑비 내릴때 얼른 갈맷길 출발이다,



동래부동헌

동헌은 일명 아헌(衙軒)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직접 공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이청(吏廳), 무청(武廳), 향청(鄕廳) 등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동래부는 정3품 당상관(堂上官)이 부사(府使)로 임명되고, 국방 및 대일외교상 중요시되었던 곳이므로

관아시설도 위용을 갖출 필요가 있어 다른 고을에 비해 규모가 컸다.
아헌인 충신당에는 그 부속건물로 좌우의 연심당(燕深堂), 독경당(篤敬堂)과 대문, 외대문,

그 바깥 문루인 망미루가 있었다. 그러나 독경당은 파괴·철거되었으며,

망미루와 외대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만은 본래의 위치에 외롭게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敷地)는 축소되었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연심당이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이건되어 갑갑한 느낌을 준다.
현재의 동헌 건물은 1636년(인조 14) 동래부사 정양필(鄭良弼)이 창건하여 1711년(숙종 37) 부사 이정신(李正臣)이

충신당이라는 편액(扁額)을 붙인 뒤로 충신당이라 일컬어졌는데,

조선시대 말까지 동래부와 동래관찰사의 아헌으로 사용되었다.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인 충신당은 우리나라

고유의 목조기와 단층집으로 원래는 방과 마루가 함께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앞면에는 각 칸마다 분합문(分閤門)이 부착되어 있지만 이 역시 원래 모습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동헌은 일제시기부터 관청 건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많이 개조된 데다 보수를 거치면서

목재 등의 재료가 대부분 교체되어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고 있으나, 부산에 남아있는 조선시대 유일한 동현이며,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동래시장

동헌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동래시장이 나온다.
전통시장이지만 현대식 건물로 지어져 가게들이 입주되어 있다.
일반적 전통시장이지만 1층에 가면 칼국수와 가정식 백반을 재미있는 형태로 먹을 수 있다. 싸고 맛있는 것이 강점이다. 동래시장은 역사와 전통의 시장으로 1770년 이전에 2일, 7일장으로 만들어져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부산의 중심시장으로 역할을 해 왔으며 1955년에 부산공설시장으로 승격되었다.
1968년 12월에 대화재 이후 부산시가 3,305m²에 달하는 대지를 싸게 불하하고 현대화를 추진한 결과,

2층 건물로 만들어져 340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다.
2002년에는 현대화 사업으로 냉난방 시설과 대형 주차장을 갖추고 2013년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되었다.

동래를 찾는 관광객을 위하여 퓨전파전 만들기 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이고 있다.

송공단

송상현 (1551년 2월12일(음력 1월8일)~1592년 5월25일(음력 4월15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이며

임진왜란 때의 장수이다, 임진왜란 초기 동래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과

교전하다가 패전 살해되었다, 왜적은 그를 포로로 사로잡아 항복을 강요하였으나 항복하지 않자 처참하게 살해하였다,

자는 덕구 호는 천곡.한천이며 시호는 충렬이다, 본관은 여산이다.

송공단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의

옛터에 설치한 단(壇)으로서, 송상현 공을 비롯하여 임란 당시 순절한 여러 선열들을 모신 곳이다.
송공단의 기원은 농주산전망제단(弄珠山戰亡祭壇)인데 이 제단은 1608년(선조 41)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李安訥)이 송상현 공의 기제사를 올리기 위해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던 조그마한 야산인 농주산에

설치하였다가 1742년 지금의 위치에 송공단을 세워 옮긴 것이다.
송공단은 처음에는 동, 서, 남, 북의 4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과 함께

부산진(釜山鎭), 다대진(多大鎭)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추향(追享)하였다.

그 뒤 동래성에서 순절한 분들은 송공단에,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분들은 좌천동의 정공단(鄭公壇)에,

다대진성에서 순절한 분들은 다대동의 윤공단(尹公壇)에 각각 별도로 모시게 되었다.

일제시기부터는 동래읍성이 함락된 매년 음력 4월 15일에는 동래기영회에서, 20여년 전부터는 음력 9월 9일에는

동래시장번영회에서 각각 향사(享祀)를 봉행해 오다가 최근에는 추념식(追念式)만 거행하고 있다.

  ▲법륜사


법륜사

법륜사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239-2번지 학소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거칠산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유서깊은 곳으로 1980년 금동관·무기 등이 출토된 바

있는 복천동(福泉洞) 고분군과 학이 집단으로 둥지를 틀고 살았던 학소대(鶴巢臺)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사찰은 불기 2442년, 서기1898년 범어사의 포교당으로 창건되어 야학운동을 통한 문맹퇴치와 3.1운동의 본거지로

민중교화와 민족정신을 배양하던 곳이다. 범어사가 1800년대 말, 지금의 부산지역 포교를 위해 개설한 포교당은

모두 5개. 이 중 서면, 영도지역 등 4개 포교당은 모두 없어고 동래 포교당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1백여년의 역사를 통해 근대 영남불심을 이끌어 온 본거지라 할 만큼 대중포교의 중심에 있어 온 사찰이다.

이와 같이 법륜사는 포교당으로서 종교적인 기능뿐 아니라 교육, 계몽적인 기능까지 겸했다.

1921년부터 경영한 ‘싯달 야학교’를 통해 배출된 스님들과 빈한한 농민의 자제들이 당시 민족 운동의 일원으로

활약하였고 동래 지역의 3.1운동과 그 이후 전개된 여러 사회운동에 깊이 관여하여 사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




박차정의사 생가

박차정 의사는 1910년 5월 8일 부산 동래읍 복천동에서 출생하여 동래 일신 여학교(현 동래 여고)를 졸업하였으며

여러 항일 운동을 주도하다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일본군과 전투 중 어깨에 총상을 입은 후유증으로

1944년 34세의 나이로 순국하기까지 한국 여성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활동하였다.

박차정의사 생가 복원사업은 항일독립운동가이자 한국여성해방운동의 선구자인 박차정의사의

남편 김원봉(임시정부국무위원, 북한노동상, 국가검열상)의 사회주의적 성향으로

군사정부시절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1995년 광복 40주년에 문민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은 지 10년만인 2005년 7월 8일 완공하였다.
시설규모는 대지 347㎡, 한옥 31,87㎡에 총 776백만원이 투입되었고, 아득한 가정집 정원에 건물내 독립훈장,

태극기, 밀성박씨 가계도, 각종 전시패널이 있으며,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 40-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래고등학교 교정에서

동래고등학교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충렬사



충렬사 본당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모시기 위해 1605년(선조 38년) 당시의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근처의 농주산에 송공의 위패를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이 그 시초이다.

그 후 1624년(인조 2년) 선위사(宣慰使) 이민구의 청으로 충렬사라는 사액(賜額)이 내려짐에 따라

송공사는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1652년(효종 3년) 동래부사 윤문거가 당시의 사당이 좁고 저습하며, 성문이 가까이 있어 시끄러워 위치가 적당하지

않다는 점과 송상현 공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가 되므로 그 학행과 충절을 선비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들어 안락동 현 충렬사 자리로 이전하면서 사당을 창건한 후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서원에서의 교육과 함께 동래의 유림에 의해 매년 2월과 8월에 봉행되는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방해를 가했기 때문에?그 기간동안?서원과 사우(祠宇 : 신주를 모시기 위해

따로 지은 집)는 보수를 하지 못하고 낡아 허물어져 갔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실시하여 현재의 규모로 정화한 후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에서 순절하거나 공을 세운 모든 선열의 위패를 직책 또는 증직(曾職)의 순서에 따라

93위의 신위를 모셨다. 현재 매년 5월 25일에는 부산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1592년 왜적이 동래읍성으로 쳐들어와 길을 빌려 달라(항복하라)고 하자 송상현 공이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글을 나무판에 써 적진으로 던지고,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11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산불예방기간이라 충렬사에서 군관청 동장대가는 길을 폐쇄하여 내성초등학교를 다시 경유하여 복천동고분군으로 발걸음 한다,

  ▲복천동고분군

  ▲복천동 고분군을 오르며 산방기간 오르지 못한 동장대를  아쉬운 맘으로 바라본다,




  ▲이 곳이 옛 무덤터였다니~~~ 지금은 산뜻하게 단장한 공원 산책로 같다,



  ▲비오는 날의 비상(飛上)









인생문

동장대에서 인생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면 학산여중과 학산여고가 보이고 언덕 위 뚝방길이 나타난다.

이곳은 계절만 잘 만나면 치자꽃 향기가 가득한 아름다운 꽃길로 변하곤 한다.
그리고 곧 인생문(人生門)이 나온다. 인생문에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는데, 왜란 때 이 문 방향으로 빠져 나온 사람이

모두 목숨을 건져 ‘사람을 살린 문’이란 뜻으로 불렸다고 한다.
평소 성내에서 시신이 운구되던 문으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하는 문이라는 설도 있다.










  ▲북장대






  ▲북장대에서 동장대 방향을 바라보고



  ▲개나리꽃이 만발하다,

  ▲동래읍성 북문


동래읍성역사관

동래구에서는 지난 40~50년 동안 무허가 건물, 경작지 등으로 방치되어온 동래사적 공원 내 동래읍성지 문화재

보호 구역을 정비하고 그 자리에「동래읍성 역사관」을 건립하여 동래 읍성의 모형, 동영상, 각종 유물 등을

전시하고 2007년 3월 개관을 하였습니다.
또한 역사관 마당에는 투호·제기차기·윷놀이 등 민속놀이체험 장비를 마련해 놓았으며,

북문광장에는 야외공연장(2,591㎡), 다목적 광장(2,330㎡) 산책로 456m 등의 시설을 갖추고

주민의 여가장소와 학생들의 견학·소풍 등 야외교육장으로 활용하도록 하였으니 많이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복천동고분군

현재 동래 중심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마안산(속칭 대포산)의 중앙부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 부산의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이다.
복천동고분군은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95년까지 부산대학교박물관과 부산시립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까지 긴급 및 정식발굴을 통해 조사된 유구는 모두 169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총 10,000여점이다. 출토유물에는 토기류 3,000여점, 철기류(금속류 포함) 3,000여점,

장신구류 4,010여점, 골각제(骨角製) 등 기타 유물 10여점, 인골(人骨) 5구, 말 이빨 등 동물유존체 7점 등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은제(金銀製)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중에서도 무구류(武具類)가 특히 많아 주목받았다.
토기로는 보물 제 598호인 마두식각배(馬頭式角杯), 오리모양토기, 등잔모양토기, 신발모양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한편 방어용 무기인 갑주류(甲胄類, 갑옷과 투구)는 복천동고분군의 중요한 유물로서 우리나라 갑옷 연구 및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의 대형 고총고분(高塚古墳)을 제외하고는

함안의 말이산·도항리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더불어 남부지방의 큰 고분군 중의 하나이며,

유물은 경주의 대형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다음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부산광역시와 동래구에서는 1982년부터 정화사업을 통해 고분군을 조성하고,

유물전시관 및 야외전시관을 통해 출토유물 및 발굴장면을 전시하고 있다.


복천박물관

1996년 10월 5일에 개관한 복천박물관은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삼한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부산의 역사를 보여주는 고고전문박물관으로서,

현재 7차에 걸친 발굴조사로 밝혀진 169기의 유구와 각종 토기 및 철기류 등의 유물을 종합 전시하고있다.
사적 제273호로 지정된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풍부한 유물과 다양한 무덤 양식들은 아직 미지의 왕국으로 남아있는 가야의 신비를 푸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웃 일본 고대문화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도 평가되고 있다.
또한 복천박물관은 개관 이후로도 인근지역의 매장문화재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여 부산의 역사와 문화,

나아가 가야사의 실체를 규명해 나가고 있다. 지속적으로 축적된 연구 성과를 다양한 학술세미나 및

특별전을 통해 전문가와 시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역사교육장으로서의 역할에도 내실을 기하고 있다.







장영실 과학동산

동래출신 조선시대 세종당시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이 만든 세계최고의 옛 천문의기 18종 19점을

동래읍성북문광장 1,177㎡에 시비 5억을 투입하여 2009. 6. 16.부터 2009.10.15.까지 4개월에 걸쳐 사업을 완료하였다.
주요복원의기로는 북문앞 광장에는 북두칠성을 주제로 혼상과 석각 천상열차분야지도, 혼천의, 앙부일구, 일성정시의, 현주일구, 풍기대, 수표, 선화당, 관상감, 창덕궁 측우기 등 11종을 배치했고, 혼상 좌 ․ 우측에 동·서양 해시계 2종을, 역사관에서 북문의 통행로 주변에는 세종대왕기념관 일구대, 평면해시계, 신법지평일구 등 5종을 현장조사,

제작, 설치까지의 전 과정에 걸쳐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동래구의 위도와 경도에 맞게 설치했다.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09년10월7일에 부산과학기술협의회와 우리구가 협약서를 체결하여 2009년 11월부터

과학문화해설사들을 배치함으로써 천문의기들의 원리와 의미에 대하여 전문적인 해설을 제공하고 있다.

  ▲장영실 과학동산에서 과학해설사 두 분으로 부터 장영실의 과학작품에 관한 설명을 장시간 들어며 공부했다, 24절기는 양력을 기준으로 하였다고~~~


  ▲동래읍성 북문

  ▲북문에서 장영실 과학동산을 내려다보고 


동래읍성

임진년(1592) 4월 15일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상세하게 그린 동래읍성 부분이다.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치열했던 교전 상황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성곽 일부가 과장되어 그려져 있지만

1731 년(영조 7) 증축 이전의 조선전기 읍성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고려말 1387년(우왕 13) 왜구가 빈번하게 출몰하자 고읍성에서 옮겨 지금의 장소에 박위가 읍성민들과 함께 한달 이상 걸려 쌓은 성이다. 둘레가 3,090척(약 657m),

높이가 13척(약 3.9m)으로현재 읍성 규모의 약 1/6에 해당된다. 성내에는 우물이 6곳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장대로 가며 뒤돌아본 북문




  ▲서장대는 2층 누각으로 조성

  ▲서장대를 뒤로하고




  ▲잠시 휴식하며 딸과의 통화




  ▲성벽을 내려서며

  ▲자비암을 둘러본다,



동래향교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聖賢)을 제사 지내는 제향(祭享) 기능,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敎學) 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향상 등 사회교화 기능도 갖고 있었다.
1392년(태조 원년)나라에서 교육진흥책을 위해 지방에 향교를 설립함에 따라 동래에도 동래향교가 설립되었다고

생각되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불타버렸다.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洪遵)이 재건한 이후

여러 차례 옮겼다가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보면 동래향교에는 종6품의 교수 1명과 학생 70명이 있으며,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학전(學田) 7결(結)이 지급되었다. 향교의 건물구조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반화루(攀化樓),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구성된 강학공간(講學空間)과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무, 서무와 내·외삼문, 사주문으로 구성된 제향공간(祭享空間)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자(孔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儒賢) 7분과 우리나라의 유현 18분을 모시고 있는 대성전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유림(儒林)들에 의해 석전대제(釋奠大祭)가 봉행되고 있다.
























  ▲7코스 7-3구간은 도보 인증대와 도장이 없어 스탬프를 찍지 못하고 끝낸다,

  ▲동래향교를 나와 동래구청 앞으로 걸어와 배종관 동래삼계탕 집으로~~~

  ▲맛 집인가 보다 손님이 많아 대기표를 받고 순서를 기다린다,

  ▲궁중약 삼계탕 특이하다, 고소하고 찐한국물이 얼마나 맛깔나던지 단숨에 한뚝배기 뚝딱이다,

  ▲옆지기 시한편 정독중

  ▲배종관 동래삼계탕 (부산시 동래구 동래로 116번길 39 (동래구청 정문앞) TEL),051-555-2464)

  ▲만나게 점심을 먹고 동래온천 허심청으로 달려왔다, 때밀고 광내자~~~

  ▲때빼고 광내고~~ 온천장역 옆 모모스커피숍에서 망중한을~~~


  ▲때밀고 광내고 커피와 디저트를~~~~

  ▲빵과 커피한잔으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집으로~~~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난감하네~~~